수비(水飛)의 생명성, 장용선의 Treasure
백 곤(미학, 서울시 공공미술 학예연구사)
<Treasure N37°32'33.504“E126°56.6604”>. 작가 장용선의 작품명이다. 작품명에 표현된 경도와 위도는 서울시 마포구 용강동으로 작가가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던 지역의 좌표 값이다. ‘보물 용강동’의 작품은 이렇다. 전시장 바닥에는 고운 흙으로 용강동의 지형을 본 따 만든 흙더미가 있고, 공중에는 20여 개의 강아지풀로 만든 구 형상의 작품이 매달려 있다. 전면 유리창에 투과되는 자연광에 의해 바닥 지형과 공중에 매달린 작품이 빛과 그림자로 뒤섞여 있는데 오후의 지는 햇빛이 용강동 지형의 흙더미를 모두 훑고 지나가면 어둠이 모든 빛을 지워버린다. 그 순간 매달려 있던 구 형상의 강아지풀 작품 속에서 미세한 빛이, 햇빛에 가려 인지하지 못했던 빛이 서서히 작품을 비추며 관객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장용선의 작품 ‘보물 용강동’은 빛이 물체를 비추고 또한 어둠이 그 빛을 잠식해가고 있는 그 사이, 작품의 내부로부터 태동하는 빛과 그림자의 경계 바로 그 언저리에 존재한다. 사이와 경계의 중첩된 언저리에서 작가 장용선은 빛과 그림자로 대변되는 생성과 소멸의 개념 모두를 아우르는 ‘생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생명’과 ‘보물 용강동.’ ‘생명!’ 이 거창하고 시원적인 개념을 어떻게 ‘보물 용강동’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생명성’은 작가 장용선이 이제껏 유기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의 금속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우주적 본질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자연의 질료로부터 예술적 가능성을 찾는 새로운 생태주의적인 접근인 것인가? 질문에 앞서 우리는 그의 작품에 대한 선입견을 거두고 형상조각과 설치, 생태미술이라는 양식적인 기준에서 벗어나 작가 장용선이 작품을 통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에 귀 기울여보자. 스테인리스 스틸 파이프의 단면을 소재로 형상조각을 만들거나 버려진 강아지풀로 만든 설치작업을 선보이든 간에 작가 장용선은 작품의 근원을 ‘생명성’이라고 규정하고 오랫동안 이에 답하기 위해 연구해왔다. 우리는 이 ‘생명’ 개념을 눈여겨 살펴야 할 것이다. 그의 초기 작품이 생명이라고 일컫는 개념의 기준과 가치를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의 연구였다면, 2014년 이후 최근 작품에서 이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실제 삶 속에서 찾고자 한다. 작품 <Treasure N37°32'33.504“E126°56.6604”>는 생명에 대한 그의 변화된 예술적 사유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1. 수비(水飛)를 통한 새로운 제안
수비(水飛), 도예에서 쓰고 남은 흙들을 버리지 않고 물에 담가 불순물을 없애고 다시 쓸 수 있는 점토로 만드는 일을 일컫는다. 재토(再土)를 위해서 흙을 물에 담갔다가 체로 거르고 말리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여 순수한 흙을 만드는 수비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장용선이 용강동의 지형을 재현하기 위해 사용한 흙이 바로 이 ‘수비하는 과정의 흙’이다. 그는 버려진 흙을 살리기 위해 고된 과정을 거치는 수비의 흙에서 그가 찾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근원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다. 수비의 흙으로 만든 용강동의 지형은 단지 수학적 좌표 값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가치와 기준에 의해 버려지고 끊임없이 세워지는 콘크리트 덩어리인 도시, 즉 우리 인간의 삶의 터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유용성의 경제적 가치를 기준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제거의 역사, 미래를 향한 발전의 메커니즘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비인간적, 비역사적인 행위들은 단지 용강동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개인의 삶 전반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비의 흙으로 만들어진 용강동을 통해 작가는 그가 살아왔던 지역적 삶의 기억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회복의 개념은 인간을 위해 자연을 제거하고 재구축해야 한다고 판단한 기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물음에 다가가는 것이다. 물론 그 물음은 답을 찾고자 함이 아니라 그것을 인지하고 반성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 ‘수비하는 과정의 흙’은 자본화된 가치와 기준의 불순물들을 걸러내는 일종의 ‘정화의 물’을 상징한다. 이 정화의 개념은 천장에 와이어를 고정하여 공중에 메달은 구 형상의 강아지풀 작품으로부터 출발하였는데, 이 강아지풀은 그가 작품을 통해 끊임없이 찾고자 하는 ‘생명’에 대한 개념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2014년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도로변 제초작업을 보게 된 작가는 자신이 이제껏 추구해왔던 ‘생명의 근원’에 대한 연구를 관념의 내부가 아닌 바깥, 즉 삶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거된 풀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무덤이 곧 개발의 논리로 무장된 도시의 무덤이라고 생각한 작가는 버려진 풀들을 모두 수거해 와 다시 그것의 쓰임에 대해 고민했다. 그는 버려진 풀들이 썩어 없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썩음 안에서 썩지 않는 다양한 씨앗들과 원형 그대로 말라버리는 강아지풀에 관심을 가졌다. 강아지풀은 스스로 썩지 않음으로 영원성을 담보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내부에 생명의 씨앗을 간직한 강아지풀을 작품의 주된 재료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강아지풀은 수비의 흙과 같이 제거와 소멸의 정화, 그리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우리 인간의 인식과 가치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의미 있는 예술적 질료가 되었다.
2. 빛을 간직한 잠재적 천연기념물
‘생명’에 대한 물음과 인식의 정화를 요청하는 작품 ‘보물 용강동’의 수비 흙과 강아지풀을 밝히는 것은 바로 빛이다. 자연의 태양빛이면서 또한 작품의 내부에 존재하는 그 빛은 흙무덤의 존재를 드러내거나 어둠 속에 숨겨 놓기도 하며, 원형의 강아지풀 작품을 밝히기도 한다. 장용선은 그의 예술적 원천인 ‘생명’의 개념을 드러내기 위해 ‘빛’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해왔다. 그의 이전 작품의 주 재료였던 금속 작업에서 ‘빛’은 아주 중요한 화두였다. 그는 생명의 기원을 ‘어둠 속에서 발광하는 빛(Luminescent in Darkness)’에서 찾고자 했고, 생명을 다한 별의 폭발, 즉 초신성 폭발(Super Nova)을 통해 사라짐과 새로운 생명의 의미를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작품이 미립자(Particle)와 암흑물질(Dark Matter) 시리즈로 제작된 것은 바로 빛에 대한 그의 진지한 사유와 고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이 빛에 대한 예술적 실험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는 오랫동안 금속을 붙잡고 이를 표현하기 위해 씨름하였다. 가령 스테인리스 스틸의 원형 파이프 안의 일렁이는 빛이나 표면의 광 처리 효과를 표현하거나 또는 알곤 용접 시 가스에서 나오는 독특한 색상이나 금속을 불에 태우거나 그슬리는 효과 등 그는 금속의 물질성을 통해 빛의 개념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물론 그가 금속을 통해 이 빛의 시각적 효과에 몰입한 나머지 조형성이 강조된 작품을 주로 제작하여 개념과 형상이 다소 상충되는 면도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형상이든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든 간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체의 원형인 미립자와 보이지 않지만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씨앗인 암흑물질에 대한 ‘생명’과 ‘빛’에 대한 철학은 그의 작업 전반에 녹아있다. 그렇기에 수비의 흙을 통한 용강동의 지형과 버려진 풀들의 씨앗으로 표현한 장용선의 작품에는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의 대비가 강렬하게 드러난다.
장용선은 사회적 가치기준에 의해 쓸모없이 버려지는 강아지풀과 이름 모를 들풀들이 언젠가는 모두 사라질 위기를 맞이할 것이라 보고 이를 ‘잠재적 천연기념물’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필요성을 상실하여 버려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 즉, 소멸될 위기에 놓인 천연기념물을 바로 ‘보물(Treasure)’이라 명명하였다. 그렇기에 작품 <Treasure N37°32'33.504“E126°56.6604”> 즉, ‘보물 용강동’은 이미 소멸된 천연기념물을 박제하여 자연과 도시, 그리고 사회적 기준에 의하여 은폐되어 있는 진실을 드러내고 이를 반성과 정화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그의 예술적 제안이다. 하찮은 것, 버려질 것들을 보물이라 규정한다면 우리는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물론 자본주의적 가치와 기준에서 이 땅과 자연은 유용성을 지닌 투자대상으로 수용될 것이다. 작가는 이 가치판단의 사유 틀을 수비 과정과도 같이 다시 재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비’를 통해 ‘생명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그의 수행적인 행위는 금속을 끊임없이 다듬는 일련의 연마 과정과, 꺾여버린 풀들에서 생명의 씨앗을 찾는 고고학적 웅크림, 그리고 인간의 딱딱해진 사유를 다시 유연하게 만드는 일종의 연금술사와 같은 예술적 정화의 행위 모두를 아우른다. 그는 최근 인간이 먹고 버린 동물의 뼈를 수비의 과정을 통해 다시 쓰임의 용도로 변환하는 것을 연구하고 있다. 도자기를 빚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뼈를 가마에 넣고 구웠을 때의 입자와 바스러짐, 빛깔을 연구하여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의 주장대로 자본화된 사회에서 사용되고 버려지는 수많은 것들은 잠재적으로 모두 천연기념물이 될 것이다. 물론 인간도 그 기념물에 속할지도 모른다. 오늘도 생명을 잃어가는 잠재적 천연기념물이 무수히 생겨나고 있다. 작가 장용선은 수비의 흙과 강아지풀을 통해 앞으로 도래할, 그러나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이 잠재적 천연기념물의 가치와 존엄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다.